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연혁

  • 신라시대 비화현, 고려현종때 경주 도독부 안강현, 1895년 경주군에 속했다가
  • 1914년 경주군 안강현에서 11개리 29개동의 강동면으로 분면되었으나
  • 1959년 경주시제 시행으로 월성군 강동면으로 되었다가
  • 1972년에 안계댐 수몰로 2개동이 댐에 흡수되어 11개리 27개동으로 줄었고
  • 1989년 군명칭변경으로 경주군 강동면,
  • 1995년 시군통합으로 경주시 강동면, 동년 5월27일 안강읍 갑산리의 일부가 강동면 모서리에 편입되었고, 1997년 유금5리 분동으로 11개 법정리, 28개 행정리동으로 되어있다.

위치 및 지역특색

  • 경주에서 20㎞지점, 시의 동북단에 위치, 동북쪽은 포항시, 남쪽은 천북면, 서쪽은 안강읍과 접하고 있으며,
  • 동.남을 관통하고 있는 형산강과 남북으로 흐르는 기계천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,
  • 경주-포항간 7호선 국도와 안강, 영천 방면의 국도28호선 분기점으로 교통이 편리하며
  • 주민생활권은 경주, 안강, 포항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으로
  •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양동민속마을에 문화재를 40여점이나 보유하고 있으며 전국 민속마을 4개소 중 원형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관광객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.

유래

  • 국당리

    옛날 이곳에 신당이 있었다 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을에서 국화재배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리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.

  • 다산리

    다산, 다질 또는 단구리의 아래쪽이 된다하여 하단구라고도 불렀다.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천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강동면 다산리로 하였다.

  • 단구리

    붉은더기 밑이 되므로 붉은디기, 단구, 달성이라 부르며 또는 다산리의 하단구 위쪽이 된다하여 상단구라고도 불렀다. 1914년 행정구역 폐합에 의하여 천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강동면 단구리로 하였다.

  • 모서리

    모암산 서쪽 아래가 되므로 모서라 불렀다.

  • 안계리

  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사곡리, 심동, 구경리, 초감리 일부를 병합하고 마을 앞에 안락천이 흐르므로 그 뜻을 따서 안계리로 하였다. 

  • 양동리

    조선시대에 이르러 어진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하여 양좌동 또는 양동이라 불렀다.

  • 오금리

    마을 뒷산이 다섯 골짜기로 이루어져 마치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오금이라 불렀다.

  • 왕신리

    옛날 이곳에 왕기(王氣)가 있었다 하여 왕신이라 불렀다 전한다. 또는 조선 선조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군을 물리쳤으므로 믿을 만한 곳이라 하여 왕신(王信)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.

  • 유금리

    옛날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가에서 한 소녀가 슬프게 울고 있음을 보고 지나던 과객이 이름을 물으니 유금이라 하였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 하는 이도 있다.

  • 인동리

    약 500년 전 경주손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경주부윤이 이 마을 못에 와서 뱃놀이를 하였으므로 어진 원님이 놀았다는 뜻으로 인좌골, 인좌곡, 또는 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.

  • 호명리

    깊은 산골이라 범이 울고 다녔다 하여 범어리, 범우리, 호명이라 불렀다.